70년대말 나의 군시절에는 열외라는 단어가 그리 나쁜 의미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열외란 연병장에 병력이 줄과 열로 대형을 이루어 집합해 있는 것에서 이탈되는 일부 병력을 말하는 것으로 훈련이나 작업을 나갈때 몸이 아프거나 다른 임무가 있을 때 그 대열에서 제외되는 것을 말한다.
또는 얼차려 등의 벌을 받을 때 우수한 사병의 벌칙면제, 아픈 사병의 고려 등으로 열외되는 병력이 발생되고는 했다
그래서 그때에는 열외되는 병력을 부러워 했고 열외되는 사유가 없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는데 요즘의 해병대 기수열외라는 것을 보니 왕따 개념으로 열외라는 의미가 부정적으로 변질되었다
그때에는 顧問官이라는 왕따의 다른 표현이 있었다 통제가 되지 않아 훈련이나 교육에서 열외되어 혼자 제멋대로 군생활을 하여 고문관과 비슷한 고귀한 신분이라고 점잖케 놀리는 용어 였는데 그런 사병을 약간은 꾸중과 질책은 하였으나 호되게 괴롭히고 후임병이 구타를 하는 하극상은 없었던 걸로 기억 한다
글쎄 그시절에는 군생활이 언론 통제가 심하였고 나의 경험이 극히 개인적인 일부분에 해당되는 것이라고도 할수 있겠다
그리고 요즘에도 언론에 나오는 군 사고는 극히 일부 부대의 일이고 대부분의 부대는 오히려 엤날보다 더 체계화 되고 정예화 되고 민주화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조직 중에서 군대가 가장 집단적이고 통일된 행동과 마음을 견지 해야 하는 집단이지만 그러한 군대에도 부득이한 열외는 발생 할 수 밖에 없는 필요악 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점점 소수의견이나 소수자들은 열외인간 취급을 받으며 다수의견이나 다수자들로 부터 우리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존재 또는 의견으로 매도 당하고 공격 당하는 일이 많아 지고 있다
얼마전 헌법재판관의 임명 청문회에서 천안함 사건의 신뢰와 확신에 대한 치열한 공방에서 왜 천안함 사건의 조사결과발표를 확신하지 않느냐고 몰아 부치는 것을 보면서 일체의 다른 생각, 다른 시각을 용납하지 못하는 우리사회의 편협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100% "믿습니다" 하고 일고의 의심도 없이 당당히 말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옜날에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믿음이 왠지 유치해 보이는 시대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의 유치에 반대하는 사람은 국민도 아니다"라고 누가 말했다는데 그러한 말들은 긁어 부스럼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다양한 생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을 매도하지 말고 같이 이끌고 가는 넓은 도량이 필요하다
자연의 꽃밭을 보라. 장미꽃이 예쁘다고 어디 장미꽃만 만개해 있던가?
수많은 백화가 함께 만발하여 서로 어우러져 아름답게 들판을 수놓고 있지 않던가.
이름없는 골짜기 들국화라고 무시하고 말려 죽이지 않는다.
획일과 열외없음은 다양성을 죽인다. 다양한 창의력을 말살한다.
유럽의 중세 가톨릭시대를 암흑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그 거룩한 하느님만 믿어도 세상이 암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는 다양성이 혼란스러움으로 느껴 질 것이다
다양성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바라 볼 수있는 혜안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래야 국운이 상승한다. 모든 국민들이 꽃처럼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