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자작시집 2292

물고기 눈

자면서도 결코 감기지 않는 물고기 눈을 보면 민망하다 불안과 의심이 진화하여 불침번의 탐조등이 되었을까 그렇게 치열하게 생을 목숨처럼 지키건만 대대손손 번번히 낚이는 것은 무슨 실망인가 그렇게 낚이고도 표정없는 똥그란 눈을 마주치면 괜히 내가 무안해 진다 아니 조금 미안해 진다 한생을 바쳐 한눈 팔지 않았던 물고기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아니 눈을 감지 못한다 애초 눈꺼풀이 없었다

생명 본능

2억년 후에는 한반도가 사라진다고 과학잡지에 써 있었다 호주 대륙이 밀고 올라와 동남아 일본 한반도가 중국 대륙과 한덩어리가 되어 초대륙을 이루고 한반도는 대륙의 중심에서 사막이 된단다 어이쿠 이게 뭐야 그럼 이제 모두 망하는 거야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사라지는 거야? 당혹스러움에 긴 한숨을 쉬다 생각하니 먼 훗날 일이야 그 이전에 이미 인간세상 사리질지 몰라 기껏 천년만년 살고지고 해보았자야 인생무상이야 무념무상이야 그저 오늘에 충실하면 돼 눈에 불 켜고 세상에 덤비지 말고 가슴에 사랑 품고 물처럼 살아야지 내일 세상이 사라진다고 해도 사과나무 심겠다는 멋진 분도 있어 그러나 인간의 과학은 본능처럼 발전하고 있어 어린 새가 본능적으로 둥지를 털고 날듯이 인간은 자꾸 우주선을 하늘로 쏘아 올리고 있어..

먼지

무엄하게도 정상에만 앉는다 우아한 공작부인의 것털모자 위에 기품있는 엘리자베스 여왕님 왕관 위에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의 우람하고 광대한 지붕 구석구석에 거룩한 노틀담 성당의 첨탑 십자가 위에 심지어 산동네 양철지붕 위에도 마음대로 내려와 쌓인다 바람이 불고 세찬 비가 내리면 쓸려가 낮은 곳에 머물다가 어느 날 슬며시 날아 올라 무한 천공에 올라 만물의 머리 위에 임하신다

회한

어린시절 가난 했어도 가난한 줄도 모르고 천방지축 잘도 뛰어 놀았네 설날에는 덩달아 설레어서 까치까지 설날 노래 부르며 손가락을 꼽으며 철없이 설날을 기다렸네 가난한 부모님 명절마다 마음 졸이며 한숨 쉬는 줄도 모르고 명절 날 맛있는 것 먹고 새옷 입는다고 혼자 들떠서 명절만 기다렸네 나도 가정을 이루고 명절마다 부족한 돈 쪼개고 줄여서 명절 인사 치레하다 보면 점점 명절이 무서워 지네 가난한 부모님 슬하에서 그나마 명절의 동심 잃지 않았네 한 시도 마음 편하지 못했을 부모님의 명절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촉촉해 지네

식당에서

밥 먹어주어 고맙습니다 아니 밥 먹여주어 감사합니다 세상사는 일이 밥 먹는 일인데 밥 먹여주는 일이 결국 세상의 일인데 형수에게 주걱뺨을 맞으면서도 볼테기의 밥알을 떼어먹으며 다른 뺨을 대는 흥부의 밥 구걸처럼 우주선을 타고 우주공간에 날아가도 밥에 김치를 얹어 먹어야 즐거이 미션을 수행할 수 있는 여전한 에너지가 밥인데 세상 사람들 밥 먹는 입을 보면 밥을 국에 말아 후루륵 후루륵 우적 우적 씹어먹는 입을 보면 아! 아! 슬프고 애처로워 눈물이 난다 저 밥을 그렇게 먹고싶어 세상에 부대끼고 애걸하고 성내고 좌절 후회하고 미쳐 날뛰었구나 눈물 젖은 밥을 먹어보지 못한 자 쉽게 세상을 논하지 마라 헛제사의 헛밥을 먹고 헛세상을 허수아비로 살고 있음을 슬퍼하여라 오늘도 어디선가 점심을 굶는 한창 사춘기의 학..

무제

천 마리의 양이 한 마리의 사자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아니, 양의 무리가 많을수록 사자들은 더욱 즐거워지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아니, 그렇게도 나약한 존재들이 끝없이 잡아먹혀도 구름처럼 불어나 들판을 덮고 지나가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아니, 천적이 없는 사자는 고작 몇 마리가 멸종동물 처럼 외롭게 숨어 지내는 것은 무슨 사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