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이야기

그리운 형

시랑사랑 2011. 9. 13. 12:14

간밤의 꿈에 형이 보였다. 몇 년만에 꿈에 보는 것 같다.

으례 내 학창시절 이었는데 항상 형은 장가도 못간 남루한 노총각으로 외롭고 고단한 모습으로 보인다.

꿈속에서 형을 만나면 애처롭고 안타깝다. 그런데 작은아버지가 형에게 무어라고 꾸중을 하고 있었고 형은 꾸중을 듣다가 혼자 집을 나가

버리는게 아닌가. 나는 울컥한 심정에 작은아버지에게 왜 불쌍한 형을 나무라느냐고 항의하는 꿈이었다.

덜컥 꿈을 깨니 새벽이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조카들은 잘 있는 것인가? 무슨 의미의 꿈일까?

37살의 젊은 나이에 어린 아들조카 둘과 형수를 남기고 28년전에 세상을 떠나버린 무정한 형이다.

그 형은 죽기 전까지 나에게는 아버지 이자 어머니 였다.

어머니는 내가 열두살, 형이 스무살에 두 형제를 남겨 놓고 지병으로 어느 가을날 소슬바람 속에 이생을 뜨셨다.

아버지는 술 주정뱅이로 가족들을 괴롭게만 했다. 

우리 두형제는 자연스레 서로 의지하며 험난한 세상을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들바들 살아 나가야 했다

그런 형이 28년전 홀연히 세상을 떠났을 때는 하늘이 정말 노랗게 보였고 갑자기 세상은 불꺼진 집 처럼 삭막하게 보였다.

이 세상, 기쁨과 희망이 가득했던 이 넓은 세상이 갑자기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동떨어진 세계로 보이면서 나는 홀로 붕 떠다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뒤에 나는 외로움이 일상이 되었다.

아무런 기쁨도, 삶의 목적도, 철썩같이 믿었던 착한 끝이 있다는 희망도 모두가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신념의 아노미를 한참 동안 겪었다

그 형은 한으로 남아 있다. 이생에서 다 펴보지 못한 삶의 에너지, 기쁨, 성취, 사랑, 너그러움, 베품, 나눔.

짦은 생애에 고생으로만 점철 된 고단하고도 외로운 삶. 눈물이 난다.

이제 그 형의 생을 나의 기억 속에서 생각 나는 대로 추적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 해원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꿈속에서 평안하게 웃으며 밝은 하늘을 나르는 형을 보고 싶다.

 

형이 대여섯 살때 인가.

군산 해망동 바닷가에서 신발을 가지고 놀다가 신발이 바다로 떠내려 가니까 신발을 건지려고 따라 가다가 그만 바다에 빠져 떠내려 가고 있었단다. 사람들은 모두 바라 보며 아우성만 칠뿐 아무도 형을 건지려 뛰어 들지 못하고 형은 바다 한 가운데로 보이지 않게 점점 떠내려 가는데 그 순간은 시공이 멈춘 듯 다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절박한 시간에 저 멀리서 작은 고깃배가 육지로 들어 오다가 해안에 사람들이 모여 소리지르는 것을 보고 다행히도 형을 발견한 선원이 물속에 뛰어들어 형을 건져 올렸다는 것이다.

정신을 잃은 형을 인공호흡하여 물을 토해내니까 그 어린아이가 살아나서 "내 신발~ 내 신발~"하며 울더란다. 선원은 화가 나서 따귀를 때렸다는데...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 어린 형이 얼마나 또 한번 놀랐을까.

아뭏든 아버지는 고마워서 선원에게 사례 하겠다고 거듭 말했지만 그 선원은 거듭 괜찮다고 사앙하여 저녁 술밥값만 주었다고 한다.

 

1960년인지 61년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우리가족은 대전의 변두리에 방1칸을 세들어 살고 있었고 형은 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양복점을 다니는 아버지는 돈벌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는 늘상 집에 있었고 우리 식구는 끼니를 굶는 날이

많았고 아버지는 몇날을 집에 들어오지 않다가 불쑥 들어 올때는 꽁치를 사오기도 하였고 돼지 고기를 푸대종이에 사들고 오기도 하였다.

돼지 고기국을 끓여 먹으면 뱃속에 기름기가 없어서 소화를 못시켜 온 가족이 설사를 죽죽 쏟던 기억이 아련하다.

어느 날이었던가?  하루 종일 굶고 저녁이 되었는데 기다리는 아버지는 들어오지 않고 한창 먹을때인 형이 배가 너무나 고파 "엄마 배고파.

엄마 배고파"하며 애걸복걸 조르는 것이었다. 어둑해 지는 방안에서 어머니는 보채이고 보채이다가 무겁게 일어나 밖에 나가더니 한참 후에

어디선가 국수를 구해와 끓여서 그것도 형과 나에게만 상을 차려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것은 없었으나 형은 너무도 배고픈 나머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한그릇을 먹어 치웠다. 그리고 엄마 보고 더 없냐고 조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여섯살인가 어려서 방에만 들어밖혀 있으니

사실 크게 배고픈 줄을 모르고 있었고 국수도 조금씩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형이 더 달라고 조르는데 엄마는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더 달라고 조르는 형이 어린 나에게도 너무 안되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국수그릇을 형에게 밀며 "형 먹어.나 배 안고파"하고 건네 주었다. 순간 형은 놀라면서도 반가워 하면서 국수를 마져 먹어 치웠다.

형이 먹는 모습을 보는데 내가 국수를 먹는 것보다도 이상하게 마음은 더 편했다

 

우리가 자주 굶는 것을 안집에서 불쌍하게 여겼는지 가끔은 나를 불러 저녁을 주곤 했는데 나는 안집 토방을 올라 밥상에 같이 앉아 밥을 얻어 먹으면서도 어린 마음에도 불안하고 눈치가 보였고 자꾸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한편으론 혼자만 얻어 먹는 밥이 미안하고 엄마와 형은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는 생각이 밥숟갈을 굼뜨게 만들었고 주인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여서 먹으라고 다독이던 기억이 꿈속같이 아련하다    

 

형이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데 집안이 어려우니 입학원서를 쓰지 못하고 말았다.

형은 공부를 아주 잘하고 있었고 담임선생님도 고등학교를 진학시키라고 부모님께 편지를 하였으나 끼니도 잇지못하는 형편이어서 어쩔수가 없는 일이었다. 결국에는 2학기말에는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졸업식도 가지 않고 기술을 배워야 하다고 아버지가 이것저것을 알아보다가 커피다방의 시다로 들어가 일을 배우라고 대전역전의 다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형은 그곳에서 다방을 청소하고 심부름하고 저녁에 자면서 다방을 지키는 일로 험하고 험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형이 없는 방에서 엄마는 나만 끼고 나날을 보냈다. 그런 날들이 한참 흐른 어느날 엄마는 형을 보러 가자며 나와 함께 시내를 나가 형이 있는 다방을 방문 하였는데 몇몇 어른들이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하고 있었다. 하얗고 검은 낡은 한복 차림의 엄마를 보고 다방마담이 인사를 하니 "헌상이 어머니 입니다" 하면서 엄마가 맞인사를 하였다.

"아~ 그러세요. 헌상아 어머니 오셨다~"하고 주방쪽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형을 불렀다. "네에?" 하면서 형이 주방 카운터에서 우리를 내다보는데 앳된 소년처럼 보였다. 집에서 나한테는 커다랗게 보였는데 다방에서는 가장 작고 어리게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것인데도 형이 거기서는 가장 어리게 보여 괜히 안쓰러워 보인 것이었다. 나는 반가움에 발만 동동거리는데 형이 커피를 내것까지 두잔 타와서는 탁자에 놓으면서 엄마와 나를 앉으라고 했다. 의자에 앉으니 푹신하게 촉감이 좋았다. 몸이 붕붕뜨는 기분이었는데 그게 소파라는 것이었다.

형과 엄마는 무어라고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고 나는 커피를 생전 처음 마시는데 구수하고 달착지근 한것이 아주 맛 있었다.

이게 웬 맛이냐. 하고 어린 속으로 생각하면서 몇번만에 달디단 커피를 다 마시고 입술을 핧으면서 더 없나 아쉬워 하던 추억이 생생하다.

엄마와 형은 일어나서 다방의 뒷문으로 나가 복도를 지나서 다른 방으로 들어 가는 것이었다. 나도 졸레졸레 따라갔는데 형은 방을 엄마에게 보여 주면서 형이 자는 방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형과 엄마는 서로 껴앉더니 서로 얼굴을 부비며 울고 서있는게 아닌가.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당황되어 고개를 숙이고 그냥 서 있었는데 엄마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아서 무척 놀랐다. 어른이 우는 것은 엄마를 통해서 처음 경험 했지만 왜 어른들이 울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 어린 나는 의아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형은 그렇게 나에게 세상 처음 다방구경을 시켜 주었다.   

   

어느 여름날 저녁이었던가

더워서 였는지 저녁을 먹고 동네사람들이 행길가에 나와 어른들은 부채를 부치며 더위를 쫒고 있었고 나와같은 아동부터 중고등학교 청소년까지 떼로 어울려 휩쓸리면서 놀고 있었는데-그 당시에는 같이 놀았다- 백열전구를 켜놓은 마당을 나와 어둑해진 길가로 들어 섰는데 갑자기 앞이 캄캄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는데도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말소리만 멀리서 가까이서 들릴 뿐 주위는 암흑 그 자체 였다. 순간 나는 꼼짝 할 수 없는 무슨 올무에 묶인 것처럼 움직 일 수가 없었는데 행길 맞은 편에서 형이 어서 오라고 소리 치는데 형이 어디 있는지 보여야 갈게 아닌가? 나는 제자리에서 더듬거리며 발걸음 질만 해댈 뿐 가지 못했다.-그 당시에는 행길에 차가 드물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니 형이 와서 왜 안 따라 오느냐고 해서 앞이 안 보인다고 울먹이면서 말을 하니 형이 왜 안보여? 하면서 집으로 가라며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대문에 들어서자 백열등 불빛이 보이면서 시력이 회복되어 마당이 훤하게 보이는게 아닌가? "형 이제 보여" 하고 나는 마당을 가로 질러 우리집 방 툇마루에 앉았다. 엄마에게 어두운 길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엄마가 옆집 어른들에게 물어보는 둥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니 야맹증이라는 것이었다. 잘 못먹어서 허약해서 눈이 약해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갑자기 외로웠다. 나는 허약해서 이제 앞 못보는 장님이 되는 것인가? 밖에 나가 뛰어 놀지도 못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먹먹한 마음으로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달음질소리, 서로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 품에서 슬프게 잠들던 어느 날 밤 이었다.  

 

무슨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려 깨어 보니 어둑한 저녁이었는데 처음 듣는 사람들소리에 놀라 일어나 보니 머리 맡에서 나는 소리 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없고 무슨 네모진 상자에서 나는 예쁜 아줌마,아저씨의 목소리 였다. "엄마 이게 뭐야?" 하고 물으니 술에 얼큰해진 아버지가 "라디오야!" 하고 대신 대답 하는 것이었다.   

     

       

  

 

     

   

 

   

 

  

 

'그룹명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가락이 닮았다  (0) 2011.12.14
하느님의 뜻  (0) 2011.12.11
2011년 9월 4일 오전 08:10  (0) 2011.09.04
늙는다는 것  (0) 2011.09.04
경험  (0) 2011.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