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이야기

하느님의 뜻

시랑사랑 2011. 12. 11. 19:21

김근태씨가 심각한 파킨스씨 병으로 병상에 있다고 한다.

병의 원인으로 심한 고문의 후유증이 유추된다는 데 뇌출혈이 터져 위기가 왔으나 현재는 고비를 넘기고 더디게 회복 중이라고 한다.

가족들이 가슴 졸이며 힘들어 했을 것을 생각하면 저으기 안쓰럽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신 부인께서 날마다 성당에서 눈물로 간절한 기도의 제단을 쌓았다고 한다. 그 분의 기도의 노고가 얼마나 고단 했을까 생각이 되지만 다행이도 하느님의 위로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려워지고 위기를 당하니까 민주주의의 투사였던 고문의 희생자 김근태 전 의원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예표를 들어내시고 경고를 하는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기도의 응답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마음이 싸아 했다. 왜 민주주의가 어려워 지는데 민주주의의 투사가 아파야 하며 그 가족이 함께 고난을 당해야 하나? 아니 오히려 민주주의를 해치고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혼이 나고 다치고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

참으로 하느님의 섭리와 응답은 너무도 어려워 이해가 어렵고 풀 수가 없다.

항상 그런 식이다. 예수님 당시의 정치적 폭압자들과 종교적 위선자들은 하나도 다치는 것이 없이 무고한 예수님만 기득권자들에게 괴씸죄에 걸려 처절하게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역사는 아이러니가 계속되고 있다. 지상의 권세가 역시 마귀의 수중으로 떨어져 버린 까닭인가?

그러나 기도의 응답마져 그런식 이어선 곤란하지 않을까? 그런 억울한 내용이 기도의 응답이어선 안된다. 그것은 하나의 위로, 자기의 최면에 불과한 것이다. 남을 죽이지 못하니까 자기를 죽이는 행위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안쓰럽고 안타깝고 슬프다.

 

영화 미션을 보면 평화롭게 살아가는 남미 인디언마을을 스페인 정복군들이 쳐들어 오는데 마을의 두명의 신부가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한명의 신부는 십자가를 앞세우고 원주민 신도들과 함께 폭탄이 작렬하는 가운데로 찬송을 부르며 행진하다 모두 쓰러져 죽고 다른 신부는 원주민들과 무기를 준비하여 정복군들과 전투를 하다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마을은 정복군이 접수하고 원주민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은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 한다.

비폭력이 폭력을 이길수 있을까? 역사에는 몇몇의 기록이 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으로 인도를 독립으로 이끌었다. 남아공의 만델라가 끈질긴 비무장 투쟁으로 권력의 인종차별을 이겼다. 대한민국의 김대중도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의 신념으로 독재를 이겨 냈다.

그러나 비폭력의 싸움은 너무도 애처롭다. 천신만고의 절벽들이 수시로 나타나며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비통하게 죽어나가야 하고 암울한 가운데 쓰러져야 한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아들을 제물로 원하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희생의 제물을 원하시는 것인가?

이세상의 평화와 평등과 자유와 행복을 거져 주시지 않는 것인가?

하느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신다고 하셨는 데 제발 인색하지 않으시고 우리 착한 생명들이 함박 웃음을 웃을 수 있도록 푸짐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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