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기가 낳지도 않았으면서도 아내가 낳은 자식을 자기자식이라 찰떡같이 믿으면서 이뻐하고 사랑한다.
하물며 소설속에서 바보도 아내가 낳은 아기가 발가락이 닮았다며 좋아하며 희죽거리는 것을 본다.
만약에 자기가 낳지 않았다고 의심하며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남자가 있다면 소심남이거나 의처증이 있는 조금 모자라는 남자로 손가락질을 받고 쑥덕공론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남자로서의 본능적 감각이며 도량인 것이다.
설령 그 아기가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한 생명의 탄생 만큼은 온 우주의 축복을 받아야 할 경사인데 거기에 초를 치는 남자는 진정한 남자가 아니다. 남자는 손에 쥐어줘야 비로소 알아 먹는 코흘리게 어린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21세기에는 의술의 발달로 남자를 만나지 않고도 우수한 정자를 구입해 태아를 잉태 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그야말로 세기말적 현상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수백만년의 인류역사상 지금까지는 남여가 만나야만 후손을 생산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러한 불변의 방법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몇십년전 시험관 아기가 출생되었을 때 부터 시작된 남여의 육체적 행위가 필요 없는 생명의 생산이 이제 절정에 다다르고 있고 미래에는 아기의 생산공장이 있어서 아기를 맞추거나 적절한 아기를 사와서 양육하는 상상 할 수 없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이천여년전 성모 마리아는 신랑 요셉을 만나기도 전에 동정녀로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 하였다.
그 당시나 지금까지도 동정녀의 잉태가 가당키나 하느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적,과학적 입장에서 믿지를 않고 기독교인들도 그저 무조건 순종하는 믿음의 자세를 보일 뿐이다. 설명 할 수도 없고 따질 수도 없는 신성 불가침의 오랜 영역이었다.
그러나 과학의술이 세기말적으로 발달하다 보니 어쨌든 마리아 처럼 남자를 만나지 않고도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놀라운 시대가 도래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조금은 동정녀 마리아의 사건이 사실로 믿어진다.
글쎄 천지만물을 창조한 조물주가 신실한 마리아를 택하여 성령을 보내 예수님을 잉태하게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구나 하고 조심스레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불신하고 손의 못자국을 보여 달라고 졸랐던 도마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자가 복이 있다고 타일렀던 예수님은 우리의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역량을 불쌍하고 안타까와 했을 것이다.
찍어먹어 보지 않고도 된장인지를 알수 있는 능력은 그저 생기지 않는다.
오랜 사색과 기도와 통찰을 거쳐야 구름속의 햇살처럼 조금씩 진리를 발견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